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은 밤사이 벌어졌던 난장(亂場)의 흔적 때문인지 안개가 낀 듯 회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햇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옥례였다.
그녀는 쓸어질 듯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 부위의 심한 통증을 참으며 어렵게 발길을 내딛던 옥례는, 앞에서 다가오는 복돌을 발견하자 버텨오던 강단(剛斷)이 온몸에서 빠져나가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황급히 달려간 복돌은 조심스럽게 옥례를 부축하여 일으켜보지만, 탈진한 그녀는 허물어지듯 복돌의 가슴으로 쓰러진다. 그녀의 몸을 받아 안은 복돌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말문을 연다.
“상처가 심한데, 약방에서 쉬지 않고 어쩌려고 무리를 한 것이야? 넌 중환자야! 지금은 움직여선 안 돼. 몸을 생각해야지––.”
무겁게 눈을 뜬 옥례는 무엇보다 대방어른의 상황이 궁금했다.
“오라버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내가 언제 별관을 나온 거지? 그것보다~~, 대방어른은 어떻게 됐어? 많이 다치신 건 아니지? 어서 말 좀 해봐요!”
약방에 누워있다가 정신이 든 옥례는 지난 밤 끔찍스럽던 악몽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떤다. 어깨의 통증 또한 온몸으로 파고 들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약방으로 오게 된 경위를 의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옥례는 복돌의 재빠른 구조로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급한 것은 대방어른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복돌을 기다리다 못한 옥례는 직접 알아볼 요량으로 약방을 뛰쳐나와 사지(死地)인 별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복돌은 대방의 안위를 묻는 옥례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대방의 비보를 알릴 수는 없었다.
“옥례야 내 말 잘 들어. 너는 지금 쫓기고 있어.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어. 너는 괴한들에게 칼을 맞았고, 그들은 네 행방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아마도 잠시 후면 그 놈들이 이곳을 덮칠 거야.”
그러나 옥례는 자신의 부상보다는 대방의 상태가 더 걱정인지 반복해서 대방의 용태를 묻는다.
“대방어른도 너처럼 중상을 입으셨어––. 지금쯤 다른 약방으로 피신해서 치료를 받고 계실 거야. 그러니 대방어른 걱정은 그만 하고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 지금 함흥상단은 괴한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아마도 괴한들의 두령은 도방(都房)인 최영섭(崔英燮)인 듯싶어. 그가 대방어른과 너를 해치고 상단을 가로채려고 노린 것 같아. 아무튼 너는 당장 경성(鏡城)으로 피신해야 돼. 회령(會寧)은 최영섭 일당들이 진을 치고 있어 매우 위험한 곳이야. 어차피 대방어른도 경성으로 옮기실 테니까, 그곳에서 만나 뵐 수 있을 거야.”
복돌은 일단 경성으로 넘어가 적당한 시기에 김삼천 대방의 유고(有故)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도대체 함흥상단이 어쩌다 이렇게 곤경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무엇보다 옥례를 안전지대로 피신시켜 기력을 회복시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옥례 역시 대방의 용태만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복돌이 하자는 대로 경성으로 넘어가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조만간 연통이 되면 그때 대방어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옥례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회령을 출발한 복돌과 옥례는 부령(富寧)과 청진(淸津)의 외곽(外廓) 길을 따라 진종일 걷고 또 걸어 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경성군(鏡城郡)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느새 석양이 내려앉으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내린 천행이었던가? 세골천(細谷川)을 건너 경성 읍내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우연찮게 옥례의 밑에서 창고지기로 일하고 있는 천 영감과 맞닥트린 것이다. 그는 달구지 위에 앉아있는 옥례를 보자 금세 안색이 굳어진다. 반가운 듯 난감한 듯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표정을 읽는 순간, 복돌은 최영섭 도방이 이미 경성까지 장악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천 영감은 경성 시장통에 빌붙어 살며 어렵게 끼니를 이어가던 건달이었지만, 옥례의 눈에 띄면서 창고에서 붙박이 일꾼으로 일하다가 엊그제 창고지기로 승차한 인물이다. 천 영감에게 옥례는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준 은인이었다.
옥례가 정색을 하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천 영감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 창고엔 별일 없으신 거죠?”
한동안 머뭇거리던 천 영감이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오늘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실토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경성 사무실과 창고는 물론 옥례의 숙소에 이르기까지 함흥상단의 모든 조직과 소유물은 도방의 무리들에게 점거되었고, 특히 옥례가 쥐고 있던 경성의 상권은 옛 경성 객주 이정홍 형제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큰 충격에 빠진 옥례는 이를 악물며, 반드시 이들을 징벌하여 본때를 보이고 말 것이라며 의기를 보인다. 결국 김삼천이 젊은 여인 장옥례와 함께 무릉도원을 헤매고 있던 수 개월 사이에 함흥상단은 허울만 남은 빈 껍데기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남자가 여색(女色)에 빠지면 부지불식간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한다는 선현(先賢)들의 말이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행수님! 경성 읍내로 들어가시면 절대 안 돼요. 그들은 돌아가신 대방어른보다 행수님을 더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었어요. 행수님을 기필코 붙잡아 요절을 내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어요.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어서 빨리요!”
천 영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옥례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급하게 되묻는다.
“대방어른께서 돌아가시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네––? 아니, 그걸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어이쿠!’ 하며 놀란 복돌이 옥례의 몸을 감싸 안으며 부연한다.
“옥례야∙∙∙∙, 진정해. 사실∙∙∙∙, 네가 쾌차해지면 이야기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정황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겠다. 대방어른께서는 지난 밤에 자객으로부터 칼을 맞으시고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