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됐어. 회령에는 장사꾼들로 미어터질 것이야. 객지사람들로 뒤섞여 있으니 우리들 신분이 드러날 리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한 밤중에 은밀하게 처리할 것이니 전혀 표가 나지 않을 것이야. 도호부에서도 일일이 신경쓰기 어려울 것이고––. 이틈에 지시한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 한다. 일단 일이 끝나면 모두 회령을 떠나거라. 기별을 넣을 것이니 꼼짝 말고 숨어있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네, 객주어른––!”
“자––, 지금부터 흩어져서 각자 산을 내려가도록 해라. 모두들 정해진 함흥상단 별관 인근에서 은밀하게 대기하고 있다가, 달이 중천에 뜨는 자시(子時)쯤 신호를 보낼 것이니 일제히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두 연놈이 요즘 깨가 쏟아지는 모양이던데, 이번에 단단히 지옥 맛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날씨 탓도 있지만 으스스한 기운이 집안을 감싸고 있는 이곳 외딴집에는 예전에 김삼천과 장옥례를 음해하다 발각되어 처절하게 상권(商圈)에서 쫓겨났던 전(前) 경성객주(鏡城客主) 이정홍(李貞洪)과 회령객주(會寧客主) 이원홍(李元洪) 형제가 몇몇 수하들을 거느리고 사뭇 긴장된 상태에서, 모의한 내용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재삼 확인하고 있었다. 아마도 옛날 경성도호부에서 김삼천과 옥례에게 당한 일을 앙갚음하려는 모양이다.
경성객주 이정홍(李貞洪)은 어떤 적수도 없이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고향인 경성(鏡城) 장(場)마당을 모조리 휩쓸며 재력을 모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여류상인 장옥례에게 쫓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류 잠상(潛商ㆍ무허가 장사꾼)으로 추락했고, 회령객주 이원홍(李元洪) 역시 두만강 변 회령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국경무역을 착실히 운영해왔는데, 뒤늦게 뛰어든 함흥상단 김삼천의 위력에 밀려 그만 상인으로서 숨통이 막힌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것은 장세(場勢) 판단을 잘못한 자신들의 무능 대문에 빚어진 결과였지만, 이들 형제는 경쟁원리의 결과는 인정치 않고 오로지 김삼천과 장옥례를 함경도 상권에서 쫓아내야만 자신들의 가업(家業)을 회생시킬 수 있다고 믿고 행동했다. 이들은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에게 온갖 뇌물을 바치며 김삼천과 장옥례를 추방하도록 갖은 모함을 다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고 지금은 장사판에 아예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도호부 정인채(鄭仁彩) 부사가 이들 형제의 끈을 잘라버린 이유는 장옥례가 전개하는 상술에 감복한 것은 물론, 옥례의 재기 넘치는 언변과 육감적인 몸매에 홀리면서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때의 수모를 통탄하며 함흥상단의 김삼천을 어떻게든 거꾸러트리고 옛 전성기를 되찾아야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고, 특히 경성(鏡城)의 여류행수 장옥례를 제거하기 위해 칼을 갈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정오가 지나서 회령에 도착한 옥례는 10여대의 우마차에 싣고 온 물목(物目)들을 함흥상단 별관 창고에 하역(荷役)하고 선별(選別)하는 작업을 독려하며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혹여 빠트린 품목은 없는지, 물량은 부족하지 않는지를 세밀하게 점검하며 여진(女眞) 쪽 상단과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녁이 다되어 재고 물목을 장부에 치부(置簿)하며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던 옥례는, 갑산에서 약제를 싣고 늦게 당도한 복돌과 마주친다. 여러 달 만에 맞닥트린 둘은 서로 어색했던지 눈길을 거둔 채 말없이 지나쳤지만, 옥례도 복돌도 서로의 가슴에 밀려오는 아픈 통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옥례가 복돌에게 꼭 묻고 싶은 말––, ‘엄니는 무탈하신가요?’라는 한마디를 결국은 하지 못하고 스쳐버린다. 엄니를 만나본 지도 벌써 몇 년째인가?
밤 늦게 별관 안채로 들어선 김삼천 대방은 옥례가 정성 들여 마련한 저녁상을 앞에 두고 마주앉는다. 상(床) 위에는 평소 김삼천이 좋아하는 너비아니, 갈비찜, 육회, 장조림, 수육, 된장찌개, 뭇국 등 쇠고기를 재료로 하는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술 역시 그가 즐겨 마시는 투명한 삼해주(三亥酒)가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옥례까지 앞에 있으니, 김삼천으로서는 벅찬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먹기엔 음식이 과중하여 뭔가 특별한 의례를 치르기 위해 받아야 하는 무거운 만찬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너를 만나게 된 게 벌써 여러 날이나 흘렀구나. 그래, 별일은 없었더냐?”
“네, 대방어른, 뵌 지가 벌써 보름이나 지난 것 같습니다. 어째 부르시지도 않고, 오시지도 않았는지요?”
“허––,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동안 네게 오기가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 것이냐?”
“네, 저는 별탈 없이 잘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대방어른! 함흥상단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소문이 나돌던데,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요?”
“아하, 너도 그 소문을 들은 모양이구나. 별일이 아니니 개의치 말거라. 우리가 어떻게 만든 상단인데 그리 쉽게 무너지기야 하겠느냐?”
“물론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소문이 괴이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내가 잠시 상단 일에 소홀했더니만, 이런 소문이 나돌더구나. 사실 상단의 기강이 요즘 많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빠른 시간 안에 회복을 시켜야겠기에 많은 고초를 겪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네게 연락도 못했고∙∙∙∙. 문제는 이곳에서 벌어질 여진과의 무역거래에 달려있다. 국경의 상권을 휘어잡아 우리의 위세를 당당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함흥상단의 여러 어려운 문제들은 일시에 사라질 것이야.”
“여진과의 거래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필요 물목을 충분히 갖추었으니까요”
떨어진 지가 불과 보름도 안 되었건만 둘 사이의 정담(情談)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겨우 잠자리에 든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가르고 파고들며 둘만의 불꽃 튀는 탐닉의 순간을 열어 나간다. 여전히 싱그럽고 관능미 넘치는 옥례의 몸은 조급하게 뿜어 대는 김삼천의 정념을 능숙하게 구슬리고 또 부추기며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궈 놓는다. 어느새 김삼천의 성애에 깊이 길들여진 탓인지, 그녀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사내의 몸을 압박하며, 한 방울의 진액(津液)도 남길 수 없다는 듯 맹렬하게 사내의 몸을 압축해 나간다. 두 사람이 벌이는 사랑행위는 항상 남성 중심으로 교합(交合)을 반복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따라 남녀의 입장이 바꿔버린 듯 오히려 옥례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김삼천의 몸을 자극하며 이끌어간다. 이것 역시 전에 없던 일로, 무언가 특별한 징조를 나타내는 것 같아 어두운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