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상단(咸興商團) 김삼천(金三千) 대방의 머리 위를 찬란하게 비춰주던 서광(曙光)은 이제 그 광도(光度)가 빠르게 줄어들면서 석양을 향해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 의주만(義州灣)의 중국무역(中國貿易)과 두만강 연안 회령(會寧)의 여진무역(女眞貿易)을 석권하여 조선 제일의 무역상(貿易商)으로 당당히 올라서겠다는 그의 야무진 꿈은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요즘, 김삼천 대방은 깊은 시름과 함께 극심한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까지 조선 북부지방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며 장세(場勢)를 휘어잡던 함흥상단 주변에 터무니없는 흉사(凶事)가 빈번하게 발생할 뿐 아니라, 쥐 죽은 듯 보이지 않던 잠상(潛商)들이 여기저기서 머리를 쳐들며 자신과 함흥상단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경쟁의 세계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장사판의 경쟁이야 말로 그 양상이 격렬하다 못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치열하기 때문에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로 바꿔져야 할 판이다. 그리고 종국(終局)에는 ‘이기는 자’와 ‘지는 자’의 형국(形局)이 섬뜩하게 갈라진다. 장사판의 싸움은 선두에 서서 일진 일퇴하는 대방(大房)의 힘과 수완에 달려있게 마련이다. 그가 자칫 방심하거나 상궤(常軌)에서 일탈(逸脫)하는 순간, 장판의 기세는 급격히 기울어져 상권 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이것이 상도(商道)의 냉엄한 철칙이다.
상거래의 귀재(鬼才)라고 누구나 인정하던 김삼천 대방이, 어쩌다 지방 관아의 관리들이나 상인 무리들의 조롱 섞인 입방아 속에 위세를 잃어가게 된 것인가?
이유는, 냉철한 상인으로 익히 알려진 그가 한낱 산골처녀인 젊은 옥례의 치마폭에 갇히면서 시작된다.
“함경도 상권을 휘어잡고 있는 상단의 대방과 산골처녀의 정담(情談)이라니~~, 어쩌다 스쳐가는 하룻밤 인연이라면 모르지만, 허허~~, 이건 아무래도 어울려지지 않는 교합(交合)이 아닌가!”
김삼천 스스로도 계집에 빠진 채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몰골이 한심하여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이 반쪽이 나더라도 옥례만은 포기할 수 없는 이 심사를~~.”
그는 이미 옥례의 포로가 된 채, 쾌락의 밑바닥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오락(五樂) 중에 으뜸이 쾌락(快樂)이라 하지 않던가!
연심(戀心)은 상대를 시리도록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되고, 연정(戀情)은 상대에 대한 믿음에서 깊어져 가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상대를 절망에 빠트리거나 매몰시키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상대를 마음 속에 함축(含蓄)한 채,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보살피기 때문에 둘 사이에 일어나는 잘못된 욕망이라 할지라도 결국 바른 길로 정화(淨化)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삼천과 옥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저극(底極)에 다다른 탐욕일 뿐이었다. 사내는 젊은 여체를 통해 젊음과 쾌락을 취하려는 원초적(原初的) 탐욕이었고, 여성은 돈 많은 사내에게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얻어내려는 재물적(財物的) 탐욕이었다. 그 탐욕은 항상 한 방향으로만 맹진(盲進)하기 때문에 판단을 흐리게 하고 정신을 마비시킨다. 그렇기에 탐욕에 빠진 두 남녀는 흘러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집요하게 한 방향으로만 전진(前進)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방(四方)을 외면하고 1방(一方)으로만 집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탐욕의 속성이 아니던가!
김삼천 대방은 의지는 비록 쇠락해가고 있지만 상단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침 회령(會寧)의 무역소(貿易所)에서 벌어지는 여진(女眞)과의 국경무역(國境貿易)을 계기로 함흥상단(咸興商團)의 위세를 다시 한번 사방에 과시함으로써 여러 악재(惡材)를 일시에 털어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한다.
최근 여진의 세력이 급격히 강대해지면서 국경무역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래규모가 확장되고 있었다. 특히 명(明)나라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진 여진은 식량과 생필품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자연히 조선(朝鮮)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조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공식 비공식적인 국경무역이 상설화되다시피 열려 두만강(豆滿江) 연안 국경지대에 때아닌 장(場)판이 활기를 띄우면서 조선사람과 여진사람이 뒤엉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활황에 힘입어 함경도 상단은 물론 의주(義州)의 만상(灣商), 개성의 송상(松商),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등 팔도의 내로라 하는 대형상단들, 그리고 군소 상인들이 죽자고 이곳 두만강 연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함흥에 머물던 김삼천 대방은 경성(鏡城)의 옥례에게 곡물과 약재를 위시한 각종 물목을 빠짐없이 준비하여 회령에 있는 함흥상단 별관(別館)으로 올라오도록 기별하고, 본인도 비장의 특종 물목을 챙긴 후 상단의 행수들을 이끌고 서둘러 회령으로 향한다.
회령(會寧)은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어 있는 함경도 북단에서는 가장 큰 고을이다.
이곳의 지형은 두만강의 빠른 유속(流速)을 따라 흘러오던 자갈과 모래, 진흙 등이 퇴적(堆積)하여 형성된 연안의 충적평야(沖積平野)를 제외하곤, 오봉산(五峯山)을 비롯해 서재산(書齋山), 민사봉(民事峯), 무릉산(武陵山), 기대봉(旗臺峯) 등 1000m가 넘는 20여개의 험산(險山)들로 구성되어 있는 산악지대다. 특히 회령천(會寧川)이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의 유선면(遊仙面)과 망양면((望陽面)이 국경무역의 중심지대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곳 국경무역 지대에서 남쪽으로 한 마장 남짓 떨어져 있는 오봉산(五峯山) 기슭에는 화전민(火田民)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꾀나 오래되고 허름해 보이는 통나무집이 산세에 묻혀 보일 듯 말듯 숨겨져 있었다. 특히 사람이 드나들기 어려운 벼랑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도망자들의 은신처 같은 음산한 집이다. 그곳 외딴집에 도회인(都會人)들로 보이는 여남은의 장정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작당(作黨)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