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

궁궐의 아침 광화문이 열리다(제3회)

추동 2019. 8. 8. 16:13


(사진-2) 도성의 한양 방위, 그리고 궁성의 궁궐 수비는 궁극적으로

국왕의 신변을 안정적으로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2. 임금의 안전이 나라의 태평성대(太平聖代)

 

궁궐 속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일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궁궐을 방어하고 국왕을 경호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임금의 생명을 지키는 일만큼 중차대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27분 임금 중에 궁궐의 방위가 뚫리고 경호가 무력해져 반군에게 생포된 임금은 10대 임금 연산군과 15대 임금 광해군이 있었고, 18대 인조는 중국 청나라에 굴복했으며, 27대 순종은 일본군에 감금되어 나라를 탈취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왕이 곧 국가인 왕조시대에서 임금의 존재는 국가의 존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임금이 명군(名君)으로서 강건하게 건재하면 국가의 위상도 태평성대를 누리는 강국으로 평가되지만, 임금이 패군(悖君)으로서 존재가 허약하면 국가의 존립(存立)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궁궐을 방어하고 국왕을 경호하는 것은 임금의 신변을 보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내외에 국가의 위용과 왕권을 드높이는 중대한 국가대사(國家大事)라 아니할 수 없었다.

궁궐을 수비하는 병사들은 비정규 인력과 정규병력으로 구분되는데, 비정규 인력은 왕과 왕비 등 왕실가족이 거처하는 생활영역을 호위하는 사람들로, 수백 명의 내시와 액정서(임금의 전령 등 왕실 잡무처리 관청) 소속의 별감들이었다. 왕실의 생활영역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군사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병사가 아닌 민간 신분의 비정규 인력이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 대신 왕실의 생활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은 정규병력에 의해 밀착 방어가 이루어졌는데, 정규병력은 금군(禁軍)과 일반병(一般兵)으로 나누어졌으며, 모두 합하여 2~3천여 명 정도의 병력이 궁궐 내에서 근무하며 각각의 구역을 철통같이 경비하였다.

 

금군(禁軍)은 궁궐 수비를 전담하는 정예군으로 무예가 탁월하고 신체 조건이 우수한 사람들로만 선발되었고,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의 세 부대로 구성되어 종2품의 내금위장, 겸사복장, 우림위장이 지휘하였다. 이들은 궁궐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밀착 경호를 통해 임금의 신변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금군과 함께 궁궐을 수비하는 일반 병력으로는 중앙군의 핵심 전력인 오위도총부의 병사들로, 궐내 곳곳에 위치한 경비 초소와 궁궐 4대문 부근에 위치한 사소(四所-東所, 西所, 南所, 北所)에 배치되어 외부인의 궁궐 침입을 엄격히 차단했다. 궁궐 내부의 방어와 함께 궁궐 외곽의 경계도 철저하여 정규군인 삼군영과 국왕의 직속 부대인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궁성 밖을 에워싼 채 외부의 궁궐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궁궐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수백 명의 수문병들도 궁궐 수비의 중요한 병력이었다. 궁궐문은 정문인 광화문에 3개의 홍예문이 있고,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각각 1개의 홍예문으로 되어 있는데, 광화문에는 중앙문에 30, 좌우 협문에 20명씩 총 70명의 수문병이 있었고, 다른 문에는 20명씩의 수문병이 배치되어 주야로 2교대 근무를 했다.

 

임금이 군사 훈련이나 왕릉 참배, 온천욕 등으로 궁궐을 떠나 있을 때는 도성 안팎에 비상계엄이 발령되었고, 계엄사령관은 유도대신(留都大臣-통상 삼정승 중 한 명이 맡음)이 맡아 수도인 한양의 행정을 한성 부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제치고 총괄 지휘했고, 수궁대장(守宮大將)은 궁궐 안의 수비를, 유도대장(留都大將)은 궁성 밖의 경비를 책임졌다. 또한 이들 3명의 지휘관은 궁궐 안과 밖에 각각 위치하여 서로를 감시, 견제하였다. 이중 수궁대장은 왕의 장인인 부원군(府院君)이 맡아 궁궐 내부를 더욱 철저히 방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