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의 역사기행

(제9화) 조선시대 사랑과 성(性)

추동 2020. 11. 12. 08:54

 

예나 지금이나 가장 흥미롭고 인간적인 이야기는 사랑이야기일 것이다.

사랑이란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소중히 여기는 정(情)을 말한다.

즉 이성인 상대에게 성적(性的)으로 이끌려 열병처럼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를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왕의 자리까지 포기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가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이며 위대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또한 인간의 문화 가운데서 ‘성(性)’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은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본능과 즐거움에 중심을 둔 쾌락으로 구분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눈이 맞아 결혼하는 이른바 연애결혼이 가능한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젊은 남녀 간의 만남이 자유로웠고, 서로 사랑하면 혼례과정도 그 절차가 매우 간소했다.

그러나 한국 ‘성문화’의 변화는 조선시대를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졌다. 조선시대는 연애, 사랑, 여색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혼례도 중매자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고 남녀는 반드시 내외(內外)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불꽃 튀는 사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각종 춘화(春畵)와 음담(淫談) 서책들이 은밀하게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아 남녀 간의 혼외정사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것으로 보였고, 신분 낮은 여성들에 대한 신분 높은 남성들의 성(性) 착취는 일반화되었는데, 이러한 성 착취는 대부분 법외(法外)의 행위로 간주되어 묵인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Me Too’ 같은 운동은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결혼과 사랑을 별개로 생각했다.

결혼은 대부분 정략 결혼이었고, 결정은 신랑집이 주도했다.

부인을 고를 때는 자기 집안의 신분과 품격이 맞는지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고, 얼굴이나 사랑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결혼이란 단지 집안의 품격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일 뿐, 사랑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의 결혼제도는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실제상으로 일부다처제가 적용되었다.

남자에겐 사랑할 상대가 따로 있었다. 진정으로 마음에 드는 여인을 첩으로 맞아들일 수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아리따운 기생(妓生)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양반과 기생 사이에 러브스토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고, 그런 사랑이야기는 수도 없이 생성되었다.

철저하게 남존여비 사상에 갇혀 있던 조선시대의 사랑은 한없이 뒤틀려 있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혼인관계 조항은

★남자 15세, 여자 14세가 되면 비로서 결혼을 허락한다.

★사대부로서 처가 사망한 자는 3년을 지낸 뒤에 재취할 수 있다.

★결혼은 가례에 의해 지내되, 납폐(納幣-폐백)한 뒤라도 양가 부모의 상(喪)을 맞으면, 3년상을 마치기를 기다려야 한다. 위반할 경우 가장이 장(杖) 일백대를 맞아야 한다.

★관향(貫鄕-본)이 다르더라도 만일 성자(姓字)가 같으면 혼인하지 못한다.

★결혼 시기를 넘긴 자가 있으면 한성부와 각도(各道)는 그들을 찾아서 호조(戶曹)와 영읍(營邑-감영)으로 하여금 특별히 돕게 한다.

★상중(喪中)에 있고 아들의 기복(朞服-상복)이 끝나지 않은 자로서 혼례를 빨리 지내게 되면 불근거상률(不勤居喪律-상중 예절을 어긴 죄)로서 논죄한다.

★집 손녀(孫女)는 이혼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남녀 간의 성적관계(性的關係)에 제한을 명시하고 있다.

친척 간에 관계를 맺을 수 없고, 하층 남성과 상층 여성이 관계를 맺지 못하며, 관리가 창녀와 관계할 수 없고, 양가의 여성을 팔아서 창녀로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性)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규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