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강추위를 견디며 잘 자라준 밀과 보리를 거둬들이는 건 물론이고, 함경도와 강원도의 객주집 객상(客商–객주가 운영하는 상점)과 여상(旅商)을 통해 약방으로 풀려나갈 버섯이며 약초를 채집하느라 마을사람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눈골마을의 하루 일과는 동이 트기 전 칠흑 같은 새벽녘부터 시작된다.
촌장(村長) 어른이 두드리는 징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면, 모두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날 밤 마련해둔 밥 덩이를 어깨에 둘러메고는 횃불을 받쳐든 채, 마을 북편 광장(廣場)으로 모여든다. 혹여 조금이라도 지체를 했다 가는 마을 촌장이신 최씨(崔氏) 어른으로부터 호되게 치도곤(治盜棍)을 당하기 때문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서둘러 광장에 당도해야 한다. 덜 깬 잠을 물리치게 하는 촌장님의 걸쭉한 객담을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미리 짜인 작업조별로 진로를 따라 험산 깊은 곳에 위치한 산물(山物) 군락지(群落地)로 이동하게 된다. 약초를 캐는 작업조의 일부는 해 떨어지기 전에 채집을 마치고 마을로 되돌아와 이튿날 할 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들은 이튿날 새벽부터 수확기를 맞은 밀과 보리를 거둬들여야 하고, 또 소나무와 참나무에 심은 송이버섯과 표고버섯을 따내느라 쉴 새 없이 땀을 흘려야 한다. 산에 남은 마을사람들은 산 속에 마련된 움막에서 며칠씩 눈을 부쳐가며 약초 채집에 전념해야 한다. 그래야 늘어난 약재 물량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눈골마을이 터를 잡으면서 해오고 있는 감자농사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감자는 기온이 낮은 산비탈에서 잘 자라주기 때문에 이곳 산골에서 경작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작물이다. 씨 감자를 적당히 잘라 싹을 틔우는 작업이 지금 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달쯤 지나 싹이 나면 개간한 밭에 심고, 밀이나 보리 볏짚과 덩굴로 덮어주면 된다. 여름이 되기 전에 수확을 할 수 있고, 수확이 끝나면 곧바로 여름 감자를 심어 늦가을이 되면 다시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다. 일년에 두 차례씩 소출을 할 수 있으니 눈골 사람들에게는 아주 이로운 밭 작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캐낸 감자는 마을사람들의 찬거리와 간식거리로 요긴하게 쓰여 지고, 더러는 산남(山南)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한다.
이렇듯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빡빡한 하루하루의 일상은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행(苦行)의 길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들 불평불만 한마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일에 열중하고 있다. 비록 작업은 고단하고 힘겹지만 일의 결실은 공평하게 자신들 앞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런 역사(役事)야말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버섯 종균(種菌)을 접종하여 재배하는 송이버섯과 표고버섯은 이곳 눈골마을 작물 중 가장 가격이 튼실하고 인기가 높아 효자상품으로 취급되었고, 마을 촌장이신 최씨 어른이 직접 버섯농장을 관장하며 특별관리를 하고 있다.
고행 속에 거둬들인 약초와 버섯은, 깨끗이 다듬어 계곡의 흐르는 맑은 물로 씻어내야 한다. 그렇게 정리가 끝난 원초(原草)들을 마을 장정들이 등에 지고 산남면(山南面) 이형석의 약제가게로 날라다 주면 마을의 작업일정은 끝이 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갈 수 있다. 이삼 일의 휴식이 끝나면 다시 산으로 밭으로 달려나가야 한다.
원초(原草)를 인계 받은 이형석은 창분과 함께 약초들을 찧거나 익혀서 말린 후, 병질(病質)에 따라 이를 혼합하고 가공하여 약제를 초벌로 조제하는 작업과정을 밟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벌약제는 옥례와 복돌이 이끄는 달구지 편에 회령(會寧)과 함흥(咸興), 원산(元山)의 객주(客主)들에게 운송이 되고, 일부는 여상(旅商)을 떠나는 덕현 편에 지방 약방으로 팔려 나간다. 약방의원들은 환자를 진맥한 후 초벌약제에 보충약제를 가미한 완제된 약을 봉지에 담아 첩약(貼藥)으로 환자에게 건네 달여 먹게 한다.
이형석(李亨錫)과 창분(彰芬)이 동업(同業)을 하기로 한 후, 약제가 이런 몇 단계 조제과정을 거쳐 함경도와 강원도 일원에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옥례를 객주집으로 보내 위탁판매를 시키기로 결정한 창분은, 옥례, 복돌과 함께 이형석을 따라 스무 날 넘게 회령(會寧)과 함흥(咸興), 원산(元山)의 객주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당나귀 수레에 싣고 간 약제 견품(見品)이 그들 마음에 흡족했던지 모두들 위탁판매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아무래도 이형석과는 서로 알고 지내던 지면관계(知面關係)가 있어 까다롭게 따지거나 견주지 않고 수월하게 거래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체결연유는, 무르익은 중년여인 창분과 터질 듯 관능미가 넘치는 젊은 여인 옥례의 자태에 정신을 빼앗긴 게 결정적 요인일 것 같았고, 그 결과 이쪽에서 내건 거래조건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 듯싶었다.
이들 객주 상권에 여인네가 상인으로 등장하기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어서 객주를 포함한 모든 상인들이 진기한 장면이라도 보는 듯 호기심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여자상인의 몸이 여태(女態)가 물씬 풍기는 미녀인지라 관심은 더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