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을 겪으면서 폐허의 땅으로 변해가던 조선반도에 소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명(明)나라의 지원군이 패색 짙은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한반도로 진주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군(日本軍)의 위세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지원군과 의기(意氣)를 되찾은 조선 관군(官軍) 및 의병(義兵)들이 연합군을 이뤄 총 공세를 펼친 끝에 잃었던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전황은 급변한다. 함경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일본 제3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했던지 급하게 철군을 서둘러 한양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고, 일시적으로 무주공산을 이룬 함경도는 한때 국경인(鞠景仁) 반군의 세상처럼 보이는 듯했다.
함경도 지역의 이 같은 분위기를 바꾸고 국경인 반군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조선 의병장(義兵將) 정문부(鄭文孚)였다. 일본군의 횡포에 더해 반군 무뢰배들에게 시달리던 함경도 민초들은 정문부를 지도자로 옹립하고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을 시작했다. 특히 국경인의 반민족 말살 행위에 격분한 정문부는 의병을 조직하자 마자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들 친일파(親日派)의 소탕 작전에 총력을 기울였고, 반군 수령 국경인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산지사방으로 쫓긴 끝에 자신의 형세가 막판에 이르렀음을 절감하고는 결국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이들 반군 무리 중에 창분의 낭군 장한식(張漢植)은 보이지 않았고, 그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7년에 걸쳐 지리 하게 끌어오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막을 내렸지만 민초들의 삶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채, 가쁜 신음소리만이 산하를 뒤덮고 있었다. 도회는 물론 산골 농촌에 이르기까지 길가에는 송장과 해골들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고,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들은 무서운 굶주림에 빠져 무엇이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그야말로 인심(人心)이고 인정(人情)이고 찾을 길이 없는 아비귀환의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전란의 후유증이 너무도 참담하여 어디에 가도 가련치 않은 인명이 없었고, 훼손된 몰골로 허우적대는 느릿한 군상(群像)들은 한없는 공황(恐慌)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과 조정은 폐허로 변한 민생은 외면한 채, 허상일 뿐인 권력욕구에 집착한 나머지 지루한 당파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란의 책임을 물어 남인(南人) 당파의 거두 유성룡(柳成龍)이 파직되고, 북인(北人) 당파는 다시 영창대군을 따르는 소북(小北) 당파와 광해군을 따르는 대북(大北) 당파로 갈라서면서 인목왕후의 후광을 업은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권력을 쥐고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당파싸움이 극한으로 내달리고 있는 동안, 조선의 가장 용렬한 임금 선조(宣祖)가 풍사(風邪)로 쓸어져 거동도,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이며 달포를 견디더니 결국은 횡사(橫死)에 이르렀고, 이 바람에 흔들리던 방통(傍統-후궁의 자손)의 왕세자 광해군은 천우신조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정권은 다시 대북 당파의 세상으로 뒤바뀌었고, 이이첨(李爾瞻)과 김개시(金介屎)가 득세하여 감히 대항할 만한 세력이 없을 지경이 된다.
즉위 초, 광해군(光海君)은 목숨 걸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만으로 조정을 꾸리지 않고 다른 당파도 골고루 중용했는데, 남인(南人)의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고, 서인(西人)의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삼는 등 ‘포용(包容)의 정치(政治)’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내치(內治)에서 광해군(光海君)의 주요 업적은 이처럼 여러 당파들을 아우른 연립정권(聯立政權) 시기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주변국 정세는 크게 요동을 치고 있었는데, 북방 대륙의 신흥세력인 여진족(女眞族-후금을 거쳐 청나라가 됨)과 국세(國勢)가 급격히 쇠락해가는 명(明)나라 사이에 전운(戰雲)이 감돌며 일촉즉발의 국면에 빠져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명(明)나라는 조선이 사대(事大)하는 황제국(皇帝國)인 동시에 원군(援軍)을 보내 지리멸렬했던 조선의 운명을 회생시켜준 은혜의 나라였고, 명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여진족(女眞族) 역시 조선과 같은 민족처럼 친밀하게 지내온 이웃 부족이었기에 이편도 저편도 들 수 없는 곤란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이런 미묘한 국제정세 속에서 광해군이 펼친 절묘한 외교력의 발휘는 명과 여진 양국을 적절히 견제하며 상호 신뢰관계를 유지하는데 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기세가 높아져 기고만장해진 광해군은 점차 심각한 자만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광해군은 내친김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여 경운궁(나중에 덕수궁)에 감금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 무참히 살해함으로써 스스로 비극을 초래했는데, 많은 훈구 대신들의 빗발치는 항소(抗訴)에 몰린 광해군은 다른 모든 당파를 몰아내고 대북(大北) 당파만을 중용하는 ‘협량(狹量)의 정치(政治)’로 퇴행했고, 그 결과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급기야 이귀(李貴)가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맞아 폐군으로 전락하며 왕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인조반정은 신하들의 불충이자 반역 행위이지만 광해군이 집권 초기처럼 다른 당파도 등용하는 ‘포용(包容)의 정치(政治)’를 계속 펼쳐 나갔더라면 이런 반정(反正)의 불행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인목대비 폐모(廢母) 사건 이후 단독 정권을 수립한 대북은 서인들 대다수가 가담한 인조반정의 낌새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기 때문이다.
반정(反正)으로 새 임금에 오른 인조(仁祖)는 번성해 가는 청나라(여진족)와 쇠락해 가는 명나라의 국력과 전력(戰力)을 도외시 한 채, 은혜를 받았던 명나라는 의리와 호혜의 나라로 숭상할 것을 선언하고, 여진족은 한갓 변방의 오랑캐 부족으로 폄하하며 국가간 일체의 상종을 끊을 것을 선포한다. 이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 간에는 심각한 외교 마찰이 빚어지며 또 다른 전란의 기미가 싹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