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漢植)을 잃고 한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던 창분은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그야말로 강행군을 펼치며 산악을 헤매다 보니 그만 체력의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순종(順從) 여인에서 강철(强鐵) 여인으로 변신한 그녀는 산간벽지 눈골마을의 자력갱생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막무가내로 쏟았던 체력이 탈진되더니 지독한 몸살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심한 오한과 헛구역질을 견뎌야 했다.
문득 헛구역질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에 엄니가 하던 말이 떠올라 산에서 캐낸 생강과 칡뿌리 갈근을 다려서 며칠을 마셔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왜 그런 건가 의심을 품으며 이리저리 손가락 셈을 하다 보니 아니나다를까, 창분의 몸에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퍼뜩 뒤돌아보니 어쩐 일인지 그녀의 몸에 있어야 할 달거리가 두어 달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태기가 있는 것인가?’
무심히 지퍼보다 이를 알아차린 창분은 순간 숨이 멎는 듯 온몸이 경직되고 만다.
망설임 끝에 순옥을 불러 자신의 몸이 심상치 않음을 실토하니, 순옥 역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가진 게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한식(漢植)과의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사실 창분이 철이 들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세습 노비로 자신이 태어났듯이, 세상에서 뿌리도 없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불행한 생명을 자기자신의 몸으로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결국 모태(母胎)의 허물을 무겁게 뒤집어쓴 채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며 평생을 천박하게 살아야 하기에, 이런 처연한 혈맥상통의 끈은 자신의 대(代)에서 끊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조선이라는 땅에서는 자신과 같은 신분 낮은 저손(杵孫)가족의 자식은 제아무리 발버둥 쳐본 들 정상적인 반열에서 사람 답게 살아가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땅은 양반들만 호의호식하며 잘 살 수 있는 양반천국이요, 겉으로는 동일한 사람 모습을 띄고 있으나 삶의 실체는 소수의 천민(天民-양반)이 사는 지상(地上)의 삶과, 다수의 천민(賤民)이 사는 지하(地下)의 삶으로 확연히 분리되어 있는 참으로 불공평한 나라가 바로 조선왕국이 아니던가! 원망스럽게도, 조선의 풍속과 법치는 모계(母系)로 이어지는 여성 혈족의 가계를 더더욱 천대하며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땅 위의 어느 곳에서도 편히 발붙이고 살 수 없는 가련한 족속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연한 현실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죄 없이 핍박받는 혈육을 비탄(悲嘆)한 이 세상에 남겨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창분의 결심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혼인도 할 수 없고 자식도 둘 수 없는 삶이 자신이 가야 할 외길 인생이려니 생각했고, 누구와 사랑을 나누거나, 또는 애증의 다툼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스스로 본능을 억제하며 단단히 몸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한식(漢植)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몸을 빼앗긴 창분은, 그러나 첫 남성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여성 특유의 순종(順從) 심리가 발동하면서 악연(惡緣)은 가연(佳緣)으로 바뀌었고, 억제하던 본능마저도 밀물처럼 기승을 부리더니 본의 아닌 부부의 연으로 진전되어, 종국에는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자신의 뱃속에 한식의 씨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창분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시련을 내리는 것인가?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팔자는 어찌 이리도 박복하단 말인가!”
창분은 충격을 견딜 수 없었던지, 한동안 가슴을 쥐어짜며 외마디 같은 신음 소리를 연거푸 내뱉으며 몸부림을 쳐 댄다.
“미물처럼 살아온 노비 신세가 너무도 야속하여 당장 죽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늘,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할 내 아이를 저주스러운 이 땅에 다시 낳아야 하다니~~. 치욕적인 노비생활은 내 대에 끝내야 한다고 그렇게 맹세를 했건만~~, 그이는 어찌하여 이런 천벌 받을 일을 내 몸에 남기고 떠나갔단 말인가?”
하며 씨를 남긴 한식(漢植)을 한없이 원망한다.
어차피 그렇게 살아가야 할 아이라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우기 위해 온갖 무서운 짓을 다해본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순옥의 만류가 완강했고, 마을의 최고 어른이신 천씨 할멈까지 나서서 창분을 핀잔하며 극구 달랜다. 사람의 생명은 어느 인간의 뜻에 따라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늘만이 행할 수 있는 천계(天界)의 일이라는 것이다.
“창분아~~! 앞으로 이런 짓일랑 두 번 다시 하지 말거라. 너는 지금 아이에게 두 번씩이나 큰 죄를 짓고 있어. 아이가 생겼으면 낳는 게 사람의 도리요, 여자의 운명이 아니냐? 그 아이도 당연히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네 뱃속에서 명(命)을 타고 났을 텐데, 그걸 거역하려 든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야. 아이가 잘살고 못사는 것은 제 운명에 달린 것이지 네가 어떻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야--. 어쨌든 너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야. 애석한 일이지만 전란으로 남자들이 씨가 마를 지경인데, 아비 없는 자식이 어디 한둘이더냐? 낳아서 잘 키워보도록 하자꾸나!”
아이의 생명이 끈질겼던지, 어미의 뜻과 달리 모태(母胎)의 아이는 성큼성큼 잘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