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잔인한 성품인 데다 목소리마저 귀신 울음소리를 닮았다 하여 저승사자라는 별호로 통하는 인물이다. 두목인 국경인(鞠景仁)의 오른팔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반도 무리를 배후에서 선동하며 이끌고 있는 조직의 행동대장 격이다. 가담하고 있는 반도들 모두가 두목인 국경인보다도 그를 더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독종 중에 독종이다.
그들은 한때 장한식과 동거동락 하던 동지들이었다. 한식이 창분을 만난 후 그들 반도집단에서 빠져나오자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정인엽을 따르는 반도들 십여 명은 한식(漢植)을 상대로 사정없이 몽둥이 매질을 해댔고, 체격이 장대하여 제법 힘 깨나 쓴다는 한식도 그들의 선제공격에 기선을 제압당한 채,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장정 두어 명에게 붙잡힌 채 꼼짝 못하고 있던 창분 역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격적인 돌발사태에 발만 동동 구르며 악을 써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반도 무리들은 창분을 내동댕이치듯 땅바닥에 던져버리고는 한식을 끌고 순식간에 산속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이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눈깜짝하는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한식이 온전하게 창분의 품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눈이 뒤집힌 채 광분하는 반도들에게 배반자의 목숨이란 그저 통쾌한 보복의 대상일 뿐, 생명을 귀히 여기는 온정이란 그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창분과 한식의 짧은 해로는 그렇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의 강을 넘어서고 있었다.
땅바닥에 한참이나 쓰러져 있던 창분은 창졸(倉卒)간에 벌어진 장면이 너무도 기가 막혀 흡사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었고, 한식이 그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그가 사라져간 삼림 쪽을 그저 몇 번이고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야말로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으니 눈물도 나올 리 없었다.
그러나 차츰 정신이 돌아오면서 방금 벌어졌던 일이 생시(生時)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온몸으로 밀려왔고, 그제야 꺼이 꺼이 하며 깊은 울음을 쏟아낸다.
“아, 아––,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이제 겨우 살길을 찾았다 싶었는데, 어째 이런 변고가 생긴단 말인가! 참으로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렵사리 맺어져 이제야 정을 붙인 사람인데 도대체 그를 어디로 끌고 갔단 말인가! 그 지경이 되어 붙들려 갔으니 목숨인들 온전할 수 있겠는가! 하, 아~~.”
아직 제정신이 아닌 창분은 흐트러져 있는 보따리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눈골마을을 향해 올라가다가 저 앞에 마을 어귀가 눈에 들어오자 풀썩 쓰러지고 만다. 얼마나 지났을까 늦어지는 창분 부부를 기다리던 마을 아낙들이 산비탈을 서성이며 기웃대다가 멀리 쓸어져 있는 창분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달려간다. 아낙들은 무슨 일인가 의아했으나, 우선 그녀를 둘러 업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옮겨 방에 불을 지피고 미움을 끓여 먹이는 등 조리(調理)를 하느라 한동안 소동이 벌어진다.
강압으로 몸을 빼앗아 긴 남자에게도 불현듯 연모(戀慕)하는 마음이 싹틀 수 있는 게 여자의 마음인가? 기이하게도 한식에 대한 창분의 마음이 그랬다. 관용으로 베푸는 너그러운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 깊이 빠져드는 헌신적 사랑이었다. 마음의 열정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지, 몸의 열기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마음은 마음대로 몸은 몸 대로 엇갈려 흐르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사랑의 실체인 것 같았다.
나비를 기다리던 꽃이 뜻밖에 벌의 침입을 받아 한 때 꽃술을 닫으려 했지만, 벌의 끈질긴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고 혼돈의 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이심전심으로 뜻이 통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더니, 급기야 서로의 속내까지 들여다보는 부부의 연(緣)으로 맺어졌는데, 그렇게 절통(切痛)의 곡절을 겪어 낭군으로 받아들인 사람인데, 앞으로 다시는 그 남자를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을 찧는 아픔이 온몸에 저려온다.
“아––, 사랑이란 오직 아픔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악령(惡靈) 같은 것인가? 사랑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기에, 상대가 눈에 들어와 있는 동안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다가, 상대가 눈에서 멀어져 보이지 않으면 그때 가서야 비로서 이것이 사랑이었구나 하며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란 것인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더니, 지금 볼 수 없는 한식(漢植)의 자취가 창분에게 엄청난 상념(傷念)으로 새겨져 가슴으로 마음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여러 날, 몸과 마음을 감추고 은둔하고 있던 창분.
그러나 그녀 앞에는 거스를 수는 없는 중대한 과제가 있어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비록 한식의 행방이 묘연하고 불길한 상황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지만, 지금 사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이렇게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창분은 솟구치는 눈물과 통한의 울부짖음은, 일단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둠으로 변할 때, 그때 그 깊은 어둠 속에 홀로 침잠(沈潛)하여 목놓아 터트릴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